<1010호> 긍휼의 정의론과 우리의 안식일
기자 : 재림신문사 날짜 : 2018-06-08 (금) 10:35
<기획> 안식일지킴의 현대적 의미 - 마지막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긍휼의 정의론과 우리의 안식일


               
                                                              - 백근철 / 궁촌교회 담임목사




“그들의 삶은 늘 유배였고 그들의 교양은 갈 데까지 가보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상식은 죽어가는 가축의 쓸쓸한 눈빛을 기억할 줄 아는 것이었다.”
- 김경주, ‘비정성시(非情聖市)’

재림교회 안식일신학의 해석적 전통에서 ‘의(義,righteousness)’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오랜 기간 ‘행함의 의냐, 믿음의 의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안식일은 그 의의 관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안식일론이 갖는 의의 특성은 어디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할까?

긍휼, 제자도의 핵심
최근 ‘부조와 선지자’를 설교하면서 화잇 부인이 가졌던 의의 특성에 관한 언급이 필자의 흥미를 끌었다.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인 아브라함은 나라를 위하여 위대한 봉사를 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용감한 사람임을 증거하였다. 이것으로 의로움은 비겁이 아니며 아브라함의 종교는 의를 지지하고 피압박인을 방어하는 데 그를 용감한 사람으로 만들었음이 드러났다. 그의 영웅적 행위는 부근의 부족들 간에 널리 감화를 끼쳤다. …… 아브라함은 정의와 인간성의 요구를 중시하였다. 그의 행동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레19:18)는 영감으로 기록된 금언을 실증한다(부조,135-136). 
필자의 독법으로는 위 구절이 이렇게 읽혔다. “[안식일의] 의로움은 비겁이 아니며(사회적 불의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종교(재림교회)는 의(정의)를 지지하고 피압박인을 방어하는 데 그(재림교우)를 용감한 사람으로 만들었음이 드러났다. 그(재림교우)의 영웅적 행위(성서적 정의론에 기반한 사회참여)는 부근의 부족들 간에 널리 감화를 끼쳤다. …… 아브라함(재림교회)은 정의와 인간성(인간애)의 요구를 중시하였다.”
긍휼(‘인간성의 요구’)은 주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예외가 없는 제자도의 중심원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가 제자를 뽑는 기준이 바로 긍휼이었기 때문이다. 제자의 선발과정이 그러했기 때문에 예수가 제자들을 데리고 만난 사람들도 주로 “세리와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 긍휼의 정신을 계승한 훗날의 사도행전의 예수운동도 자연스럽게 종교적 지배담론에서 탈피한 ‘소수담론의 발굴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긍휼의 하나님, 안식일 정신
사회적 소수집단으로서 재림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생성되는 담론의 특성은 다수지향적인가, 아니면 소수지향적인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주에도 언급했듯이, 실제로 안식일 율법의 의미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확장성에서 찾아본다면 ‘너[他]’에게서 ‘객(客)’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사회적 소수자, 혹은 배제된 자들에게로 안식일준수자의 관심이 향해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일은 나 자신을 위해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수 있는 날이지만 안식일은 다른 날이다. 안식일에는 너의 관심이 너 자신에게만 온통 쏠리는 것을 경계하고 숨 돌릴 틈 없이 살아가는 변두리 인생들을 좀 돌아보라는 제안이다.
김회권 교수는 월터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에서 강조되는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주목하면서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와 실천은 예언자적 긍휼에서 발원되었다. 긍휼은 비판의 근원적 형태이다. 예수의 긍휼은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공적인 사회 비판이었다. 예수는 이 아픔 속으로 뛰어 들었고, 마침내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구현했다. 예수는 지배 문화가 거부한 사람들의 애통을 긍휼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냈으며, 이렇게 아픔을 구현하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권위는 지배 문화의 파멸적 종말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왕권 의식에 대한 결정적 비판이 된다.”
긍휼이란 ‘감정적 반응’이 아니고 사회 ‘비판의 근원적 형태’이고, ‘하나님나라 선포와 실천’의 기원이라는 주장이 흥미롭다.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반포하기에 앞서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출20:2)라고 자신을 규정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출3:7-8)려는 바로 그 하나님이셨다. 안식일 계명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강조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긍휼이라는 계명의 핵심 원리다.



타인의 고통에 함께 우는 날
그렇다면 율법은 대원칙은 무엇일까? 두말 할 것도 없이 그것은 예수가 율법사에게 강조했듯이 사랑(긍휼)이다. 인간의 극단성은 폭력성으로 드러나지만 예수의 극단성은 그의 사랑에서 드러난다.
마15:22에 보면, 예수에게 온 가나안 여자가 이렇게 절규한다. “주님,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생각하시고 도와주세요! 제 딸이 귀신들려서 매우 고통 받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가나안 여자를 쫓아내는 것이 예수를 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예수를 열심히 따라다니긴 했지만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몰랐다. 그런데 가나안 여자는 알고 있었다. 예수가 어떤 마음으로 이 땅에서 사시는지를 알았고, 먹고 남은 부스러기 인생조차도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말한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러므로 안식일에 예배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한다. 내가 믿고 있는 종교는 자비로운 종교인가?
베데스다 연못에 수많은 환자들이 있었다. 그곳에 예수님이 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질문을 한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자기가 나으려고 모인 사람들이었지 네가 낫는 것에는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그래서 물이 동(動)할 때 사람이 서로를 밟고 지나간다. 영원히 고독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없어서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낫고자 함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네’가 낫고자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보편적 이성을 가진 사람의 눈에 ‘구원’을 테제로 하는 집단이 그저 지옥의 아수라장으로만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안식일, 삭개오 정신
우리가 대속을 말할 때 흔히 쓰는 영어 atonement를 어떤 신학자들은 at-one-ment(하나됨)으로 읽는다. 가나안 여인이 말했다. 나를 불쌍히 여기라고. 자신의 딸을 불쌍히 여기라는 것이 아니고, 나를 불쌍히 여기라는 것이다. 엄마에겐 딸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아픔이 있는가”(애1:12)라던 선지자 예레미야의 절규와 일맥상통한다. 내가 가진 이 근원적인 고민을 당신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딸 하나 안 키워본 당신이라도 진정성 있는 신앙을 하고 있다면 당신도 함께 느껴야할 것 아니냐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던 것이다.
지난주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우리는 흔히 신앙을 내적이고 개인적인 혹은 사적인 차원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런 신앙의 오해가 기독교 국가가 즐비한 유럽에서 히틀러라는 괴물을 키워냈다고 말한 바 있다. 신앙을 사적 영역으로만 한정할 때 역사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극단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영화 ‘밀양’의 원작인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도 신앙을 철저하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즉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해되었기 때문에 독자들의 공분을 산 것 아니었을까?
그래서 삭개오의 회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신앙은 결코 사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삭개오는 “자신의 재물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돕겠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것을 착취한 일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예수와의 만남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 결과는 철저하게 공동체지향적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구원은 오직 ‘너’만을 위한 구원이 아니고 너뿐만이 아니라 ‘너와 네 집’의 구원도 선포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 말은 오늘날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자에게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피해와 상처를 입은 모든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치유해야할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고서 정의를 새로운 차원에서 해석하게 된다. 네 배나 갚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예수의 자비를 통해 자기가 알고 있던 율법의 글자를 넘어섰다. 삭개오가 예수를 만난 후 벌어진 일은 공동체적 관점에서의 복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삭개오가 예수를 만난 사실 자체가 그의 이웃들에게는 강탈당한 재물을 도로 찾을 수 있는 복음이었다. 삭개오의 회개야말로 재산을 빼앗긴 주변 사람들에게는 복음 그 자체였다. 안식일 지키는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 삭개오의 회개가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롬1:16-17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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