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9호> 공공재로써 안식일의 사회적 위치
기자 : 재림신문사 날짜 : 2018-05-24 (목) 13:43
<기획> 안식일지킴의 현대적 의미

공공재로써 안식일의 사회적 위치


               
                                                              - 백근철 / 궁촌교회 담임목사




철학자 박이문이 쓴 ‘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라는 책엔 ‘공적 언어의 사적 왜곡’이라는 장(章)이 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진보’라는 것의 사전적 의미는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진보’라는 단어의 의미를 좁혀서 그들만의 전유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진보’는 마르크스주의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고, ‘보수’는 반-마르크스주의자를 가리키는 말로 말이다. 본래 넓은 의미를 갖고 있는 공적 언어를 사적으로 왜곡했다는 고발이다.
그는 또 ‘기독교’라는 단어의 사용에도 날을 세운다. 가톨릭, 동방정교, 개신교 모두 예수 믿는 기독교인데, 왜 기독교가 그 단어를 자신들의 집단만 가리키는 독점적 용어로 사용하느냐는 것이다. 안그래도 한국에서 배타적인 종교의 상징처럼 취급되는 기독교도의 입장에서는 얼굴이 붉어지는 지적이다.

예수를 이해하는 차원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양상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매튜 폭스는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를 ‘우주 그리스도’로 표현한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가 단순히 지구인만을 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화잇 부인이 강조한 대쟁투도 지구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지 않을까? 그것은 욥기를 기반으로 한 우주적 차원의 대쟁투다. 그렇게 신앙을 넓은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신앙이라는 넓고 공적인 개념을 자꾸 축소하려는 사람도 있다. 우주 그리스도를 지구적 차원으로의 그리스도로, 아니면 그저 사람만을 위한 그리스도로, 아니면 온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를 오직 재림교인만을 위한 그리스도로 말이다.
‘시대의소망’에 의하면, 오병이어의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랬다고 한다. ‘이 예수는 우리 유대인만을 위한 그리스도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 우주의 왕을 이스라엘만을 위한 왕으로 만들고,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온 예수를 자기 집단만을 위해 존재하는 예수로 만들겠다는 발상이다. 박이문 식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예수’라는 공적 언어의 사적 왜곡이라 할 수 있다.

독점적 소유욕과 보편적 신앙의 차이
예수님은 그들의 열광과 어떤 점에서 근본적으로 달랐을까? 요3:16을 보면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바꾸어 이해한다. “세상을 사랑하여”는 오직 교회만을 사랑한다는 말로, “누구든지”를 정식으로 재림교회에 입교 절차를 거친 사람만으로 한정해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의 범위, 사랑의 범위가 다르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말한다. 이 세상이란 헬라어는 훗날 영어로 우주의 어원이 된 ‘코스모스’다. 예수님이 우주, 혹은 천하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코스모스를 향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우리는 ‘나의’ 하나님 혹은 ‘내 집단의’ 하나님으로 바꿔 놓기 바쁘다.
그런 점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할 말이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조차도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누가 앉을 것인가가 제자들의 중요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가면서도 뒤에 남겨진 제자들을 바라본다. 한때 빛나던 신앙이 침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만 예수의 축복을 독점해야한다는 이기심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회적 재난과 안식일
여러 해 전에 어떤 사람이 인터넷 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글의 제목은 ‘각종 대형 재난들과 안식일’이었다.
혹시 과거에 우리가 자주 들었던 간증의 주요한 포인트가 이런 것 아니었을까? “안식일을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안식일을 잘 지켰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켜서…” 오직 재림교인만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하나님, 하나님은 정말 그런 분일까? 그리고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그토록 열심이었던 이유는 결국 예수 때문이 아니고 ‘복’ 때문이었나? 그렇다면 히11장 말미에 등장하는 복이라곤 지지리도 없었던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맞았으며 사슬에 묶여 갇히기도” 했던 사람들, “돌로 맞기도 하고 시험을 당하며 톱으로 몸이 잘리거나 칼날에 죽음을 당”했던 사람들,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고 온갖 학대를 받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대연각 호텔 화재 사건
<197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대연각 호텔에 화재가 발생했다. 외신에까지 보도된, 이 대화재로 165명이 사망하여 온 국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어떤 투숙객들 몇몇은 뜨거움을 견디다 못해, 매트리스를 안고 15층에서 창밖으로 뛰어내렸으나, 죽음의 순간을 몇 초 연장한데 불과할 뿐, 지면에 닿을 때는 시속 90~150km 이상의 속도가 되어 몸이 부서지면서 땅에 부딪힌 반동으로 튕겨 올랐다가 떨어져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날 곧 1971년 12월 25일은 ‘안식일’이었다. 따라서 모두 교회에 가 있는 안식일교인들은 하나도 죽을 수 없었다.
◆ 서울 시민회관 화재 사건 
<1972년 12월 2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불이나 공연을 관람하던 청중 53명이 사망하고 76명이 부상당했다. 그 중 옥상으로 피신한 상당수는 헬리콥터로 구조됐으나, 어떤 이는 줄을 잡고 가다 놓쳐 떨어져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런데 그 날도 역시 안식일이었다. 그러므로 그곳에 하나도 없었던 안식일교인은 죽을 수가 없었다.
◆ 인천의 큰 술집 화재 사건
<1999년 10월 30일> 인천 중구 인현동 ‘호프 러브’라는 큰 술집에서 화재가 발생, 55명 사망. 그곳 참석자 중에는 학생들도 많이 죽었다. 그 날도 역시 안식일이어서 삼육학교 학생들은 하나도 거기 없었다.
안식일엔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 물론 다른 날 화재도 많지만, 30명 이상 사망한 화재는 다 안식일이었다. 그러나 안식일에 나지 않은 화재도 단 한 번 있었는데, 그곳은 안식일교회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니 곧 청량리 대왕 코너 화재 사건이다.
◆ 청량리 대왕 코너 화재 사건
<1974년 11(12)월 3일> 청량리 대왕 코너에서 일요일에 화재가 발생해, 88명이 사망하고 3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안식일에 나지 않고 왜 일요일에 일어났을까? 그것은 대왕 코너의 꼭대기에 SDA 영어학원이 있었고 그 안에 재림교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화재는 안식일 교인들을 피해 났으니, 예배 다 드리고, 직원회 다 끝나고 난 후, 방문갔던 이들, 시무집사 장로들 다 돌아가고 난 후, 저녁이 지나, 일요일 새벽에 불이 났다.


안식일과 짐승의 정신
광야에서 돌로 떡을 만들라는 사단의 시험은 여전히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그 시험이 예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백성들에게는 진리처럼 여겨졌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예수를 오로지 자기 집단만을 위한 복지의 왕으로 만들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들의 요구는 진리같이 돈 안 되는 말은 그만하고 그냥 빵이나 달라는 것이다. 불의, 착취, 사회적 불평등, 종교적 위선을 배격하는 공적인 주제들은 설교하지도 말고 그저 빵이나 먹으면서 세상이 흘러가게 하라는 요구다. 그것은 도덕적 고결함, 영원한 가치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그저 영혼이 없는 고깃덩어리로, 밥이나 축내는 금수로 추락시키라는 사단의 요구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한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이 ‘떡’에 대한 것 아니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이 빵 없이는 못살지만 왜 먹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는 종교가 기독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이 금식이었던 것은 먹는 행위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반추해보게 하는 사건 아니었을까? 고상한 가치를 위해 때로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줄 아는 고결한 정신과 용기를 가진 사람들, 인간이 빵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삶으로 입증하는 사람들의 모델이 되려고 하신 것은 아니었을까?
구약학자 김근주는 “기독교 신앙이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 제한되는가?”라는 질문으로 ‘복음의 공공성’이란 자신의 책을 시작한다. 신약에 대한 기독교의 해석적 전통이 구약의 주된 담론인 ‘공의와 정의(체다카와 미슈파트)’를 배제하고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영역에 치중함으로 알맹이가 빠진 복음이 돼버렸다는 일갈이다. 창18:19에서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일이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요구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김근주는 “아담과 하와 이래로 사람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본받은 왕적 통치를 감당할 자들”이고, 이스라엘 왕의 이상이라 할 수 있는 “다윗이 정의와 공의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언급은(삼하8:15), 다윗이 하나님이 지으시고 부르신 사람의 본보기임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구약의 많은 구절(시33:5; 89:14; 97:2; 사5:16; 33:5)이 하나님이 세상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분임을 증언한다는 점은 사람이 행하는 정의와 공의가 실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본받는 것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는 회개 또한 “하나님의 통치에 합당치 않게 살아온 것을 애통해하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돌아가는…‘전향’”이라고 말한다. 회개는 도덕적 완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하나님 나라의 신민으로서 합당하게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는 “‘나라’를 인식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선포는 개인 윤리에 불과하다” 기독교인들에게 도전적 메시지를 던진다.
그동안 우리의 안식일은 어떠했는가를 돌아보게 하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혹시 안식일 성수의 의미가 이 땅에 가쁜 숨을 몰아쉬는 수많은 사람들의 보편적 필요는 외면하고 나만 쉬면된다는 ‘개인윤리’에 국한된 계명으로만 이해된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우리의 안식일은 노예처럼 살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수많은 을(乙)들의 한숨 소리를 외면하고, 짐승들과 짐승보다 못한 삶을 강요받는 객(외국인 노동자와 같은)들의 소리 없는 흐느낌에 애통하기는커녕 그저 개인의 내면적 평화를 추구하는 일에 급급하지는 않았을까?

두 부류의 안식일준수자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는 두 부류의 안식일준수자들이 있을 것이다. 안식일의 개인성에 주목하는 부류와 안식일의 공공성에 주목하는 부류다. 사적 신앙의 영역을 부정해서는 안 되겠지만 신앙의 개인화 혹은 개별화, 파편화는 신앙공동체에서 부단히 경계해야 요소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안식일이 가진 공공성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공성, 혹은 공동체적 성격이라 부를 수 있는 안식일의 이러한 공적 성격은 안식일 계명이 가진 논리적 흐름과도 부합된다. 나에서 가족으로, 종으로, 짐승으로, 객에 이르기까지 안식일준수자의 관심은 자기초월로 인해 공동체중심의 관점으로의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는 날인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 계명은 ‘소유(having)’에서 ‘존재(being)’로, ‘행위(doing)’에서 ‘되기(becoming)’로, 개인화된 삶에서 공동체적 삶으로의 부르심인 것이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 강조했듯이, 안식일은 ‘시간속의 지성소’다. 시간이라는 공공재로 지어진 하나님의 거룩한 집인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시84:3)는 날이며,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신10:18)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주의 은혜의 날이 돼야 한다(눅4:18,19).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의 역할을 자임해온 우리에게 안식일 담론이 야훼의 공의와 정의가 회복되는 공동체의 날이라기보다는 아직까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롬14:5)는 수사적 차원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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