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호> 잊어버린 안식일과 잃어버린 안식(2)
기자 : 재림신문사 날짜 : 2018-05-18 (금) 13:04
잊어버린 안식일과 잃어버린 안식(2)

               
                                               - 백근철 / 궁촌교회 담임목사


안식일 준수에 대한 화잇의 날카로운 지적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간접적 언어와 침묵의 소리’에서 이렇게 하고 있다.
“형식주의를 비난하는 것이 옳은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종종 형식주의의 과오가 형식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식을 너무 과소평가해 의미와 분리시키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틀과 내용, 형식과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은데도 균형을 잃은 진리 추구가 의미의 거세를 낳는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주장은 형식의 해체가 아니라 진리 추구 과정에서 나타나는 견지망월(見指忘月)의 우(愚)를 경계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시대의 소망’은 그 두 부류 사이의 극명한 대조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선택하였다. 곧 정신이 없는 형식, 알맹이 없는 껍질을 취하기로 하였다.” “예수께서 제시하신 율법의 대강령은 사람들이 지어낸 쓸데없는 규칙들과 현저히 대조되었다.”

율법주의와 안식일 정신
우리는 율법을 강조하면서도 율법주의자라는 말을 참 싫어한다. 율법주의는 본래 좋은 말이다. 성경에 계명을 지키라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 율법주의자인 것이다. 오죽하면 천지가 없어지기까지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강조했을까? 그런데 율법을 강조한 예수님이 다시 질문한 것이 있다. ‘법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안식의 날을 무거운 짐이 되는 요구 사항들로 둘러싸서 사단의 뜻을 성취시켰다. 그리스도의 시대에 안식일은 매우 왜곡되어서 이 날의 준수는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품성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이고 변덕스러운 사람들의 품성을 반영했다. 랍비들은 사실상 사람들이 순종할 수 없는 율법을 주신 분으로 하나님을 나타냈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나님을 폭군처럼 여기게 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안식일의 준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잔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이런 그릇된 관념을 없애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이었다”(소망).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면서 그 율법주의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율법을 빙자해서 불순종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하라면서 강요하면 안 된다. 그것은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불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의 참 정신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막고 율법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탕자의 형이 가진 정신
우리는 어쩌면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탕자의 형같이 되기가 쉬운 것 같다.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었던 아들이었지만, 탕자를 위해 잔치를 열어주는 아버지의 마음은 전혀 모르는 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친아들이었지만 노예처럼 산 사람이었고, 탕자처럼 아버지를 벗어나 멀리 반항의 여정을 떠난 적도 없었지만 그야말로 아버지의 참 뜻대로 살아본 적이 없는 아들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삶은 광야에 살더라도 자유인으로 살라는 것이었지 먹을 것 많은 이집트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철저하게 무임승차한 사람들이었다.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성취와 승리를 한 사람이 아니고 안식의 승리를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안식일에도 바로처럼 말한다. “너희의 역사나 하라.” 바로의 언술은 오직 일할 때에만 네 존재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안식일에 누리는 안식은 행함의 가치인가? 아니면 쉼의 가치인가?

애굽의 안식과 가나안의 안식
애굽이 주는 안식과 하나님이 주는 가나안 안식은 차원이 다른 안식이었다. 에른스트 블로흐가 구분했듯이, 자본주의적 세계가 제공하는 “계속되는 착취”를 위한 “공허한” 휴일과 “존재의 낯섦이 사라지”는 “존재가 완전히 나의 것이 되는” 안식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고 하신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애굽의 신전보다 더 크고 화려한 성전을 짓게 하려고 히브리 민족을 불러낸 것이 아니었다. 애굽과 이스라엘의 차이는 일의 차이가 아니었고, 쉼의 차이였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왕 바로라면 애굽을 나오는 과정 자체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과 같지 않았을까? 홍해의 승리는 행함의 승리가 아니고 믿음의 승리였다. 활동의 승리가 아니었고 “가만히 있어”라는 안식의 승리였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네가 네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기적이었다.



노예의 휴식과 아들의 안식
노예와 주인의 삶의 차이는 아마도 멈출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같은 일을 해도. 주인은 원할 때 멈출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노예에게는 그런 자유가 없다. 신앙이라는 것은 쉼으로의 초대다. 성경의 역사에서 일은 늘 하나님의 몫이었고, 언제나 쉬는 것은 인간의 몫이었다. 심지어 안식일에도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 관계여야 할까? 무언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스러운 관계는 아닐 것이다. “와서 잠간 쉬어라”와 같은 안식의 관계다. 이 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관계이고 “평안”의 관계인 것이다. 안식의 관계라는 것은 요구가 없는 관계임을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도 안식이었고 끝까지 지켜야 할 것도 안식이었다.
오랫동안 포도원 품군들의 비유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어릴 때부터 경쟁적인 교육환경에 익숙해진데다 무언가를 받기 위해서는 거기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거래의 개념이 나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그 비유를 보게 됐을 때, 그 비유가 새롭게 내게 다가왔다. 일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제 시간에 온 사람들이 아니라 ‘늦게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야말로 용기와 믿음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일한 사람은 결코 은혜를 알 수 없다. 일한 그들에게 구원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들은 구원의 잔치자리에 올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잔치는 수고한 사람을 위해 여는 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인은 일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은혜로 잔치를 열기 때문이다.
“정한 때가 이르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셔서, 그들을 자기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여러분 마음에 보내 주셔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옛적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사실 신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참 하나님을 압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아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에 여러분이 따르던 약하고 헛된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가려 합니까? 어찌하여 그런 것들에게 종노릇 하려 합니까?”(갈4:4~9)

구속으로부터의 구속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일까? 구속(拘束)으로부터 구속(救贖)함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당당한 아들이라고 갈라디아서는 말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리를 알게 하신 것이다. 자유케 하시려고. 그렇기 때문에 진리라는 말이 당신을 얽어맨다면 그것은 이미 비(非)진리인 것이다. 진리가 당신을 눈치 보게 만든다면, 끊임없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깊이 의식해야할 진리가 사람인 누군가를 자꾸 의식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이미 비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무엇보다 이 말씀을 기억하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8:31,32)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안식일은 나를 구속하는 날인가? 아니면 나를 자유케 하는 날인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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