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7호> 잊어버린 안식일과 잃어버린 안식(1)
기자 : 재림신문사 날짜 : 2018-05-10 (목) 15:09
잊어버린 안식일과 잃어버린 안식(1)

               
                                               - 백근철 / 궁촌교회 담임목사


이렇게 삶의 의미를 묻는 작업이 비단 시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를 성찰해야만 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신앙인들에게도 종종 찾아오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땅에서 ‘안식’교인이라는 별칭을 가진 재림성도들에게는 ‘안식일의 의미’는 평생의 화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면 그러한 화두에 대해 엘렌 화잇은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시대의 소망’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베데스다 못가에서 예수님이 38년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그건 오랫동안 불치의 병을 앓아왔던 중풍병자에겐 뛸 듯이 기쁜 복음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새로 얻은 힘을 기뻐하면서 굳세고 자유로운 발걸음으로 자기 길을 서둘러 가고 있을 때에 몇 사람의 바리새인을 만났다. 그는 즉시 그들에게 자신의 병 나은 것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그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냉담하게 듣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이마를 찌푸리면서 그의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왜 그가 안식일에 자리를 가지고 다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주의 날에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그에게 엄격히 상기시켰다.”
아마도 이런 것이 소위 재림교회 안에서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반응일 것이다. 한 마디로 하자면, ‘기억하는 신앙’이라 부를 수 있겠다. 그런데 정작 예수를 만났던 중풍병자에 대해 시대의 소망은 매우 흥미로운 진술을 하고 있다.
“그 사람은 기뻐서 그날이 안식일인 줄도 잊어버렸던 것이다.”

기억하는 신앙과 망각하는 신앙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거기엔 아마 두 종류의 신앙이 있을 것이다. ‘기억하는 신앙’과 ‘망각하는 신앙.’ 오늘 우리 신앙은 어떤 것인지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매 주일 잊어버릴까봐 강박적으로 ‘안식일을 기억해야’ 유지되는 신앙인가? 아니면 예수를 만난 것이 너무 기뻐서 ‘안식일인 줄도 잊는’ 신앙인가?
‘장자’ 달생편에 이런 말이 있다. “발을 잊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고, 마음이 시비를 잊는 것은 마음이 꼭 맞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업은 아기 삼년을 찾는다”라는 말도 있듯이, 아이와 내가 하나이기 때문에 업은 아이가 전혀 불편하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혹시 그런 뜻은 아니었을까?
왜 어떤 사람은 기억하는 신앙에 머물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잊어버리는 신앙까지 도달하는 것일까? 엘렌 화잇은 그 두 부류사이에 있는 차이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판단에는 그분께서 안식일에 앓는 사람을 고치심으로 율법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명함으로 신성모독죄를 범했다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너무나 왜곡시켜서 그 율법을 속박하는 멍에로 만들었다. 그들의 무의미한 요구들은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특별히 안식일은 갖은 형태의 무의미한 제한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안식일은 그들에게 즐거운 날도, 여호와의 성일도, 존귀한 날도 아니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준수를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짐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성화를 평생의 과업이라고 한 화잇의 말을 자주 들어왔다. 때문에 성화란 은연중에 나를 늘 괴롭히고 억누르는 금욕의 의미는 아니었나 자문해볼 일이다. 이제 성화에 대한 엘렌 화잇의 이런 관점이 필요할 것 같다. 즐거워서 잊어버리는 그것이 반복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것. 기억하는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선지자는 진지하게 되묻는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 중에서도 그들의 마음을 성령에 대하여 강퍅하게 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할 수 없도록 만드는 자들이 많지 않은가?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유전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있지 않은가?”

율법의 한계
중풍병자에 대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냉혹한 비판은 예프게니 자먀찐의 디스토피아 소설‘우리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소설 내용처럼 모든 집의 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범죄가능성이 원천봉쇄된 ‘감시사회’, 원하든 원치 않든 어떻게든 법을 의식(기억)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그런 ‘투명사회’가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의 모습일까? 지상에 법이 없는 사회나 국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법이 있으되 그 법이 이미 마음에 새겨져 있으므로 법의 존재조차 모르는, 법 없이도 사는 사람들의 나라, 그곳이 바로 천국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왜 그래야만 할까? 그것은 법이 가진 한계 때문이다.
법은 법을 악의적으로 적용하는 사람을 규제할 방법이 없다. 더구나 법위에 있는 초법(超法)적인 존재에게는 매우 무기력한 것이 법이다.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했을 때, 오히려 진짜 심판을 받아야할 사람들은 ‘공법’을 사유화한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총독, 유대의 왕 헤롯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성복 시인이 ‘남해금산’이란 자신의 시집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아픔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 아픔을 가져오게 한 것들을 은폐하거나 신비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죄도 마찬가지 아닐까? 죄의 목록들만을 강조하다보면 그 죄를 가져오게 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고 쉽게 덮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법은 죄의 배후인물이나 죄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구조를 처벌하지 않는다. 죄를 짓도록 교사한 사람까지는 처벌할 수 있지만 그 죄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구조나 제1원인에 대해 심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법은 늘 죄인을 심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신다. 법은 우리 사회에 범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근본원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죄인을 적발해서 처벌하기는 쉽지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해서는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식일과 타자의 윤리
법은 법만을 보게 하고 사람을 보게 하지 않는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공정함이고,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공의’일 것이다. 그런데 출20:8의 안식일 계명을 가만히 뜯어보면, 거기에는 행위의 목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히 “기억하여…지키라”했는데 지키는 방법들, 혹은 금지규정들(할라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만들었던 39가지 할라카의 목록들 대신에 “너, 네 아들, 네 딸, 네 남종, 네 여종, 네 육축,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사람에 대한 법이고, 사람을 위한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킨다는 말은 인간을 지킨다는 말이고, 안식일을 기억한다는 말은 타자(혹은 나아닌 모든 존재)를 기억한다는 말이다(생태신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안식일의 의미를 인간으로 한정하는 것에 유의해야함은 물론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눈이 멀어서 안식일의 목적을 오해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마12:7)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무정한 많은 의식들은 항상 하나님의 참된 경배자들의 특징이 될 참된 고결함과 온유한 사랑의 결핍을 보충해줄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물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진리를 다시 반복하셨다. 그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었다. 제사의 목적은 사람들을 구주께 이끌어서 하나님과 조화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은 사랑의 봉사이다. 이것이 결여된 채 행하는 의식의 단순한 반복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이다. 안식일 역시 그러하다. 안식일은 사람들로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하기 위하여 제정됐다. 그러나 마음이 피곤한 의식에 골몰해 있을 때에 안식일의 목적은 훼손됐다. 안식일을 단지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은 헛수고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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