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호> 관계적 선교
기자 : 재림신문사 날짜 : 2018-04-19 (목) 15:48

하나님 나라와 
          선교(7) - 마지막회

관계적 선교



                      
   - 최경천 / 삼육대학교 신학과 교수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예루살렘은 단순히 도시나 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인화된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시137:5). 하나님이 계시는 한 평강(안식, 누아흐)이 보장됐다(대상23:25 참고). 예루살렘의 평강은 하나님께서 임하신 모든 사람들의 영혼 속에 주어지는 축복을 대표한다. 아론과 제사장들은 기도할 때에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샬롬)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6)라고 기도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샬롬)의 복을 주시리로다”(시29:11)라고 노래한다. 
이 평강의 도시 예루살렘이 역사적으로 훼파될 것이지만 메시아의 등장으로 회복되는 기별이 구약성경을 통해 반복적으로 전해졌다. 예수님의 초림을 예언한 이사야는 메시아로 묘사되는 “한 아기”가 “평강(샬롬)의 왕이라”(사9:6)고 설명한다. 이사야는 “악인에게는 평강(샬롬)이 없다”(사48:22; 57:21; 59:8 참고)고 전한다. 예레미야 역시 “평강(샬롬)하다 평강(샬롬)하다 하나 평강(샬롬)이 없”(렘6:14;8:11)는 상태로 이끄는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헛된 기별을 폭로한다. 예레미야는 평강을 얻는 정로를 제시한다.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쉼, 마르고아)을 얻으리라”(렘6:16). 미가는 이 평강이 메시아의 통치를 통해 일어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샬롬)이 될 것이라”(미5:5). 스가랴는 잃어버린바 된 예루살렘이 다시 회복될 것을 예언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슥8:3). “축복”이란 의미의 이름을 가진 학개 선지자는 회복된 성전의 영광이 이전 영광 곧 솔로몬 성전보다 더 클 것을 예언하며, “내가 이곳에 평강(샬롬)을 주리라”(학2:9)는 여호와의 약속을 전한다. 메시아가 이 재건된 성전에 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슬픔 가운데 예루살렘 성의 운명을 보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외치셨던 이유가 무엇인가? 당시 예수님의 눈은 평강이 있어야 할 각 사람의 영혼을 향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메시아를 거절하므로 평강을 잃어버리게 될 각 사람의 마음을 보시며 통곡하신 것이다. 메시아가 왕으로 임한 모든 사람의 마음에 평강이 있다. 하지만, 메시아를 거절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평강이 없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지만 평강이 없다(렘6:14; 8:11 참고).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성전정결의 의미
예수님은 지상봉사 중에 두 번 성전정결을 시행하셨다. 이처럼 신랄하게 비평하고 분노하신 적이 없으셨다. 채찍으로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뒤집어엎으실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건물 때문인가? 예배 때문인가? 만민의 “기도하는 집”(마21:13;막11:17;눅19:46)을 “장사하는 집”(요2:16)으로 만들었다고 한탄하신 것은 무슨 의미인가? 반복하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고전3:16;6:19 참고). 그런데 장사꾼의 거래적 태도가 사람의 마음을 차지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딤전6:5)하는 마음이 신앙을 하나의 밥벌이 도구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의 마음이 장사하는 집이 되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 평강이다. 평화와 평안과 안식이 깨어진다. 모든 것을 손익계산으로 따지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인생이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분쟁이 생긴다. 그래서 바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에게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6:5)고 기록했다. 평강의 도시 예루살렘이 깨어지는 것이다. 서로를 소외시키기 시작한다. 연합이 깨어진다. 
흥미롭게도 시편 122편은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던 노래인데 예루살렘을 “조밀한 성읍”(시122:3)으로 묘사하고 있다. ‘조밀하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바르,’ 영어로 ‘compact’로 쓰였는데, ‘연합하다, 결합되다, 묶다’라는 의미로 우가릿어로는 ‘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루살렘 도시의 건축이 집마다 서로 연결돼 있는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무너지지 않는 공동체는 서로서로가 깊게 결속돼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 그랬다. 그런데 하나님을 거절하니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평안이 깨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결혼에 대한 창조주의 이상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마19:6). 이 평화는 마음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동안 유지될 것이었다. 하나님 대신 죄가 들어오고 난 직후부터 사람들은 서로를 소외시키기 시작했다. 이익의 제단 위에 평화를 제물로 드렸다. 
구원은 사람의 마음에 성령께서 내주하시므로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변혁적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가정마다 연합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된 교회와 기관과 단체마다 화평과 평강이 있다. 교회는 지역사회의 깨어진 관계들을 회복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선교는 곧 관계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
다시 하나님의 나라 신학의 기본 텍스트인 누가복음 17장 20, 21을 읽어 보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 여기서 “안에”라는 헬라어 원어는 신약성경에서 3회 사용된 ‘엔토스’인데 이것은 ‘내부에’(within)라는 뜻도 있지만, ‘가운데’(among)라는 의미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적 차원의 나라와 사회적 차원의 나라를 발견한다. 먼저,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시도록 초청한 모든 개인의 마음이 천국이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소개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para, 곁에)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en, 안에, inside) 계시겠음이라”(요 14:17). 성령께서 거하시는 우리 개인이 하나님의 나라다(계1:6;5:10 참고). 그러나 천국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 이 말은 천국이 우리 사이에 있다, 우리 관계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엔) 거하신다”(요1:14). 이 말씀은 마 18:20에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떠올린다. 여기서 “중에”는 헬라어 ‘메소스’로 ‘중간의, 한가운데에, 사이에, 중에’라는 의미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하나가 된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이 계신다. 거기에는 천국의 특성이 화평 즉 평강과 평화가 있다. 
이 평화는 인간사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다. 남편과 아내가, 상사와 부하가, 부모와 자녀가, 선생과 제자가, 목사와 신자가, 친구와 친구가, 나라와 나라가, 조직과 조직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가 평화다. 예수님은 언젠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눅12:51)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누가복음 12장은 법적 시비가 있을 때에 “화해하기를 힘쓰라”(눅12:58)는 말씀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오히려 인간이 가진 재물에 대한 이기심이 형제간의 분쟁을 일으킨다(눅12:13). 같은 장에서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죽기 살기 돈 벌다 가는 인생들에 대하여 경고하신다(눅12:16~21). 하나님 없이는 평화도 없다. 결국, “그의 나라를 구하라”(눅12:31)고 초청하신다. 
평화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하나님과의 소외(깨어진 관계), 인간 사이의 소외(깨어진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 누가는 예수님이 초림하실 때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고 노래한 것을 기록했다. 그런데 누가복음 19장에서 좀 다른 이야기가 발견된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하늘에는 평화요”라고 노래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하니”(눅19:38). 그랬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지만, 사람들은 평화라는 것은 하늘에서나 있는 것이라고 외친 것이다. 평화는 이 땅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다음의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딸이,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눅12:53). 이 평화를 깨는 분쟁을 예수님이 조장하고 계시는가?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느냐 아니냐의 결정적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리스도 없는 모든 관계가 두 쪽 날 것임을 이야기 하신 것 아니겠는가? 삶의 주인(눅12:43,47 참고)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피비린내 나는 분열을 보고 아파하신 게 아닐까? 그래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하고 질문을 던지시므로 화평과 분쟁의 이야기를 끌고 나아가신 것이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모든 신자들은 평화의 나라가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가 생성된다. 스바냐 선지자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습3:17)라고 노래한다. 이때 가운데는 히브리어로 ‘케레브’인데, ‘내부, 중앙, 한 가운데 가운데(midst, among)’를 의미한다. 레위기 등엔 ‘내장’으로 번역됐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의 마음에 세워지기도 하지만, 인간관계 속에서도 세워진다.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 되면 화목이 일어난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한 다음에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말씀하시면서 관계적 천국이 세워지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천국에 간 사람들은 이 땅에서 천국으로 살아간 사람들이다.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들은 반드시 이 땅에서 천국으로 살아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면 화평의 나라가 된다. 결국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 역시 나의 일용할 양식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일이 포함되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 기도, 공동체를 위한 기도, 사회를 위한 기도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이며, 천국을 이루는 기도다. 주기도문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13)로 마치지 않는가?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초청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예수님의 주기도문에서 용서의 기도를 요청하신 것이 ‘화목하게 하는 말씀’ 아닌가? 누가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마지막 말씀을 명확하게 기록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눠 제비를 뽑아 분쟁하는 배경에서 예수님은 화목의 기도를 올리셨다. 

관계선교 
선교란 예수님께서 외치셨던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세상을 포기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 말고, 종말에 오게 될 영광의 나라만 기다리라고 전하는 게 옳은가? 예수님의 모본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오직 그리스도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만 사람들을 접촉할 때 참 성공을 거둘 것이다. 구주께서는 사람들의 유익을 소원하는 분으로서 그들과 섞이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 대한 당신의 동정심을 보여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시고, 그들의 신임을 얻으셨다. 그 후에 그분께서는 “나를 따라오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치료,143).
예수님은 사람들과 섞이셨다.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셨다. 선교는 지역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 존재의 이유를 찾아 주는 것이다. 불안한 미래와 현존하는 위기들 속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우리의 삶과 봉사를 통해 보여주는 주는 것이다. 선교는 전적으로 신뢰로 세워진 관계를 통해서 이뤄진다.
“개인적 노력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해 갈 필요가 있다. 설교하는데 시간을 더욱 적게 쓰고, 개인적 봉사에 많은 시간을 썼을 것 같으면, 더욱 큰 결과가 나타났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구제를 받고, 병든 사람들은 간호를 받고, 슬픔과 사별(死別)을 당한 사람들은 위로를 받고, 무식한 사람들은 가르침을 받고,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권면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해야 한다. 설득력과 기도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수반될 때, 이 사업은 결실이 없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없을 수도 없다”(치료, 143).

   

 
주소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망우로 21길 18, 302호 / 전화: 02)960-0690 / 팩스:02)968-2293 / 이메일: 3004news@hanmail.net /등록번호: 204-29-34632 Copyright ⓒ 재림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