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3호> 하나님 나라와 전인적 선교
기자 : 재림신문사 날짜 : 2018-04-13 (금) 11:49

하나님 나라와 
          선교(6)

하나님 나라와 전인적 선교



                      
   - 최경천 / 삼육대학교 신학과 교수




하나님 나라 세계관
선교는 전인적(holistic)인 주제다. 선교는 말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evangelism)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하는 자가 없이는 아무도 복음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전도가 있어야 하지만 회심은 단순히 지적인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회심은 중심 곧 세계관이 변하는 사건이며, 삶의 모든 방식이 하나님나라의 세계관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세계관은 사탄의 세계관과 반대된다. 사탄의 세계관은 이사야 14장에 묘사된 것처럼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이는 세계관이다. 한마디로 올라가는 세계관이다. 하지만 하나님나라의 세계관은 빌립보서 2장에 묘사된 자기를 비우는 세계관(케노시스)이며, 겸손과 희생의 세계관이며, 용서와 낮아짐의 세계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선택했다는 것은 사탄의 세계관을 공개적으로 거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가 세족예식을 행하는 목적이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누군가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단순히 겸손하게 살겠다는 표시가 아니라 사탄의 세계에 도전장을 내미는 행동이다. 내가 한 사람의 발을 씻기는 행동을 통해 높아지는 삶이 아닌 낮아지는 삶을 살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표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길 때 사탄은 자신의 세계가 위태롭게 되는 것을 느끼며 두려움에 떤다. 교회는 가능한 자주 서로의 발을 씻기는 예식을 통해 사탄의 세계를 도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주기도문 역시 대쟁투세계관을 통해서만 그 진가가 드러난다. 주기도문은 단순히 예배가 마치는 순서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주기도문은 기독교 교리의 총집산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를 요약해 놓은 강령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전쟁이 촉발된 대척점을 공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가 임하옵시며”(마6:10). 대쟁투는 “누가 하나님나라의 주인인가?”로 시작됐다. 인간에게는 “내 마음이 누구의 나라인가?”의 문제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13).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은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최종적으로 어린양에게 주어지게 된다고 결론짓는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 주기도문은 우리의 영광을 위해 사는 대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의 기도다. 그래서 우리가 주기도문을 암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계14:7), 사탄은 두려워 떤다. 우리는 더 자주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전인적인 복음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전인적인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고후10:5), 행동을 바꾸고(행3:19), 삶 전체를 바꾼다(행 16:31). 또한 복음은 개인을 바꾸고, 가정을 바꾸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전인적’이라는 말은 헬라어 ‘holos’에서 왔다. ‘모든, 전부, 전체(all, entire, total)’라는 의미로 인생의 전 영역 곧 생물학적, 화학적, 사회적, 경제적, 정신적, 영적 등의 영역을 다 포함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사용했던 ‘샬롬(shalom)’이라는 인사말에서 전인적 차원의 구원을 이해했다. 샬롬은 ‘평화, 웰빙, 복지, 번영, 안전, 건강, 완전, 전체, 충만, 정의’ 등을 의미하는 단어다. 또한 샬롬은 관계적인 개념이다. 샬롬은 하나님과의 화평은 물론 사람과의 화평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지상봉사를 시작하실 때 이사야서(61장)를 인용하시며, 희년(jubilee)의 기별을 선포하셨다(눅4:18). “주의 성령이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이 “주의 은혜의 해”가 희년이다. 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7번 지나고 나서 50년째 맞는 해가 희년이다. 이때 그 동안 사회적 불균형을 가져왔던 소유권과 신분제도가 다시 재부팅된다. 사회적, 개인적 정의가 실현된다. 모든 빚이 탕감받고, 노예들이 자유의 몸이 된다. 말라기 선지자와 침례 요한이 등장할 때 까지 약 400년 동안 이 희년 제도가 실행되지 못했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격화됐고, 권력집중 현상이 일어났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읽으시고 난 다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21)고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등장은 모든 약자들과 소외된 사람들의 해방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 모든 변화는 인간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재확인: 하나님 나라의 본질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고 말씀하셨다. 그의 나라는 성령께서 임하신 개인의 마음 속에 건설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도 이사야 61장을 인용하실 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눅4:1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화잇 여사는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근본적인 관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예수께서 사시던 그 당시의 정부는 부패하고 강압적이었다. 도처에서 토색과 편협과 잔인한 압제 등의 악폐들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주께서는 사회 개혁(civil reforms)을 시도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국가의 권력 남용을 공격하지도 않으셨고 국가의 원수를 정죄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권력을 장악한 자의 권위와 행정에 간섭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모본이신 그분께서는 세속적인 정치(earthly governments)를 멀리하셨다. 그분께서 사람들의 재난에 무관심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구제책이 단순히 인간적인 그리고 외적인 조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제책이 효과가 있으려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미쳐야 하고 반드시 마음을 개심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법정이나 회의나 입법기관의 결정, 또는 세상 위인들의 후원을 얻어 설립되는 것이 아니요, 성령의 역할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을 인간의 마음에 심음으로 이뤄진다”(소망,509).
예수님은 모든 국가적, 사회적 정의는 인간의 마음이 성령께서 임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될 때 효과가 있음을 아셨다. 그의 사명은 분명했다. 에스겔이 전한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6)의 기별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국가를 전복시키거나 사회적 폭동을 통해 건설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건설된 사람들을 통해 그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가 하나님 나라의 예고편이 되도록 일했다. 일례로 정치인 요셉과 다니엘이 그랬다. 놀랍게도 애굽 왕 바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창41:38)라고 고백하며 요셉을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창41:43)였다. 느부갓네살 대왕은 다니엘을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단 4:8)로 알았다. 다니엘은 왕에게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단 4:27)”라고 정의로운 통치를 위해 조언했다. 



천국복음과 신앙적 행위
복음의 핵심은 ‘인간의 마음이 성령께서 거주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거주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인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다. 이것은 혼자 맺는 열매가 아니라, 사회적 열매이다. 사랑이 혼자서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하나씩 대입해 보라). 어떤 신자들이 서로 불화하고 있다면, 성격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신자가 거친 말을 함부로 내뱉는다면 성격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지 질문해 봐야 한다. 성령은 자비와 양선의 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분이지 않는가? 
예수님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삶이 하나님나라가 되게 하셨다. 우리의 신앙적 행위들은 죽고 난 다음에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들이 아니다. 예배 참석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봉사하고, 선교하는 일은 이 땅에서 실천되고 누려야 할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리는 행위들이다. 예배의 시간에 들어갈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안에 이뤄진 천국을 노래하고, 즐거워한다. 신자들이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함께 모이는 교회가 될 때 우리의 예배와 찬미와 기도가 어떤 모습이겠는가? 교회가 가진 최고의 도전은 신자들의 마음에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며 살아가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지도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 신자들이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문제도 아니고, 헌금을 정직하게 드리게 하는  문제도 아니고, 봉사에 잘 참여시키는 문제도 아니다. 아무리 설교해도 교회가 변화가 없고, 생명력이 없다면 지도자가 맥을 잘못 짚은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신앙을 한다. 우리는 승리하기 위해 살지 않는다. 이미 승리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십자가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증거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했다고 증거한다. 그래서 설교는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찬미 역시 천국복음을 노래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행하는 봉사 자체가 천국복음이다. 우리의 모든 교리 역시 하나님나라의 원칙과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재림교인들이 믿음의 기둥으로 여기는 안식일과 재림, 성소기별, 죽은 자의 부활 등의 교리 전부가 하나님 나라의 기별이 아니라면 죽은 기별이다. 복음은 듣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과 전혀 무관하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유쾌하게 된다(행3:19). 만약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유쾌함이 없다면 내 마음이 문제가 있든지, 아니면 기별자에게 문제가 있다. 교회는 공장도 아니고, 회사도 아니다. 마치 영혼이라는 상품을 인간의 노력과 전략으로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처럼 기독교 복음을 소개하고 있다면 싸구려고 쓰레기고 사기다. 복음은 전인격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고 능력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의 기도문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일상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가르침에는 사회적 복음이 내포돼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머리로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따르며, 손으로도 따른다. 감옥에 갇힌 침례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서 물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3). 이 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4,5). 
천국복음은 죽은 뒤에나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매일의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과 어려움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단순히 긴급한 필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음식과 의복과 집을 제공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구호(relief)에 해당된다. 복음은 물고기를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친다. 개인적 개발(personal development)이 이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는 청년들에게 돈을 잘 벌 수 있는 길을 찾아 줄 역할이 있다. 정직하게, 의롭게 주님이 “돌아오기까지 장사”(눅19:13)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또한 물고기를 제공하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물고기 잡는 도구들을 제공해 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회적 개발(social development)이다. 건강한 지역사회를 이루는 주거와 직업과 건강관리와 교육 등의 사업이 여기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구조적 변화(structural change)가 있다. 불공정한 정치, 경제, 환경, 문화적 조직과 체계들을 변혁시켜 나가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모든 사람들이 소외됨 없이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연못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도록 하는 것이다. 

천국복음과 지역교회의 역할
지역교회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땅을 버리고 탈출할 사람들을 모은 곳이 아니다. 마치 전장에서 헬리콥터를 대기시키고 퇴거하는 군인들을 서둘러 태워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는 구조대 같은 것이 아니다. 언젠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그분이 준비한 천국으로 가겠지만, 그 때까지 교회는 전쟁이 일어나는 이 땅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전장으로 달려가는 특전사들이다. 불편하지만 야전텐트를 치고, 환자들을 치료하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전열을 가다듬고 또 다른 사탄의 포화를 대비한다. 이 전쟁이 다른 전쟁과 다른 점은 이미 전쟁의 승패가 결정났다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고,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으며, 우리를 통해 그 소식을 전해들은 모든 사람들은 간혹 들리는 포탄 소리에도 평화를 노래하고(예배), 숨을 돌리며(안식일), 안전한 평화를 누린다(성소). 그리고 주변은 정리가 되고(사회개혁), 사람들은 건강과 행복을 다시 맛본다(샬롬). 복음은 인간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며, 머리와 가슴과 손 모든 것이 구원을 위한 도구가 된다. 전인적 구원이며, 전인적 복음이다. 
교회는 이 땅에서 너무나 많은 일할 기회들을 마주하고 있다. 각 세대와 각 분야와 각 지역을 하나님 나라의 예고편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기회들은 넘쳐나고 있다. 단순히 예배하고, 봉사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직장과 이웃 사람들, 그리고 믿지 않는 가족들과 친족들이 우리를 통해 전인적 구원을 맛 볼 수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야 한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는 이유는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마5:15)게 하기 위함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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