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호> 복음과 문화
기자 : 재림신문사 날짜 : 2018-03-29 (목) 16:23

하나님 나라와 
          선교(5)

   복음과 문화



                      
   - 최경천 / 삼육대학교 신학과 교수




복음은 사람의 말로 전해진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복음은 각 문화가 처해있는 사람들의 이해수준으로 전달돼야 한다. 하늘의 진리가 인간에게 계시될 때에도 인간의 언어로 전달됐다. 엘렌 화잇은 “교훈은 사람의 말로 사람에게 전해져야 했다”(소망, 34)고 기록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인간을 만나신다. 인간에게 진리를 전하시기 위해 천상의 언어를 선택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성경에 사용된 헬라어는 당시 사람들이 길에서, 시장에서, 집에서 사용하던 일상적인 언어였다. 
1895년에 옥스퍼드 퀸즈 대학의 두 교수, 그렌펠(Bernald Grenfell)과 헌트(Arthur Hunt)가 이집트 옥시린쿠스(Oxyrhynchus)에서 9m 높이의 쓰레기더기를 발굴했다. 여기에서 엄청난 양의 파피루스를 발견됐는데 대부분이 편지와 유언장, 영수증과 청구서, 그리고 계약서 등의 개인문서와 공적문서들이었다. 또한 3세기와 4세기에 사용되던 복음서의 일부분과 초기 기독교 찬미가와 기도문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 발견은 당시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신약성경의 언어가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같은 학자들이 쓰던 언어였을 것이라는 기대가 깨졌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언어들은 바로 당시 사람들이 매일의 일상 속에서 사용하던 언어였다.
사복음서가 대중의 언어로 기록됐다는 사실이 선교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지대하다. 상당수 재림교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가 이해하는 내용을 우리 식으로 전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일은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깨닫게 하시는 일은 성령의 일이라고 일축한다. 하지만 로마서는 성령께서 인간의 일을 대신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선택해 복음을 전하신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그분의 의지요 의도였음을 알아야 한다. 

수용자의 이해수준과 복음전달
우리가 잘 아는대로 다니엘서 2장과 7장은 동일한 예언이 두 명의 인물을 통해 주어졌다. 하나는 느부갓네살 대왕이고 하나는 다니엘이다. 연속적인 네 왕국에 이어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하기 위해 제시된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달랐다. 인간 역사를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이 비전을 전달하기 위해 느부갓네살 대왕에게는 그가 익숙하게 잘 알고 있었던 우상이라는 매체를 사용하셨다.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은 이 우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우상이 예배하고 섬기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다니엘서 3장에서 우상을 만들어 절하게 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이 이해하고 있는 이미지를 사용해서 그를 만나셨다. 
하지만 히브리 선지자 다니엘의 경우 창세기 1장과 2장에 묘사된 창조의 이야기를 통해 미래를 보여주셨다. 다니엘에게 보여준 이상은 바람이 부는 바다에서 시작한다(단7:2; 창1:2). 그리고 동물들이 하나씩 등장한다(단7:3~6; 창2:19,20). 그리고 모든 동물들을 통치하시는 ‘인자’가 등장한다(단7:13,14; 창1:26~28). 이 창조이야기로부터 주어진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아담이 모든 동물들을 다스릴 권한이 있었던 것처럼, 인자가 오실 때에 다니엘의 백성들을 괴롭혔던 모든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만이 인간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통치하시는 역사의 주인임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에게는 느부갓네살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다니엘에게는 다니엘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이상을 보여주셨다. 



사상영감과 복음
사복음서 역시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네 개의 복음서가 주어진 이유는 한 명의 저자가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태는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복음서를 기록했다. 이와는 반대로 마가는 이방인인 로마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님의 위대한 사역들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누가복음은 철학과 진리를 사랑했던 헬라사람들을 위해 기록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노래와 영감과 인터뷰가 기록돼 있다. 요한복음은 창조받은 모든 인간을 위해 기록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요한복음 3:16절이 그래서 우리에게도 마음에 와 닿는다. 모든 인간은 제한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사람마다 자신의 경험과 삶의 배경으로부터 복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복음서의 다양한 접근이 가능했다.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마가나 요한복음을 선호한다. 동일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함으로 여러 형편에 처한 사람들이 각자의 이해의 범위에서 복음을 만나는 것이다. 
복음이 그 문화권 속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형편과 이해 수준에 맞도록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성육신 자체가 증명한다. 놀랍게도 하늘 왕이신 예수님은 연예인이나 정치인으로 등장하지 않으셨다. 1세기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던 유대인으로 오셨다. 지역 언어와 문화를 익히시고 사람들과 함께 섞이셨다. 함께 배고프고, 피곤하고, 씻지 못하셨다. 때로 실망하고, 분도 내시고, 슬퍼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지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특정 시간과 장소와 언어와 환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그들이 있는 장소에서 만나시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엘렌 화잇은 가려뽑은 기별 1권에서 성경의 영감과 기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성경의 저자들은 저희 사상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성경은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서 기록됐다. 이러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 성경은 단절되지 않은 계속적인 말씀의 고리를 잇는 형식으로 인간에게 주신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계승되는 세대들을 통해 여러 가지 경우와 다른 장소에 따라 인간에게 감동을 줄 적절한 기회를 발견하실 때마다 부분적으로 주신 것이다… 성경은 어떤 장엄한 초인간적인 언어로 꾸며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처해 있는 그 위치에 이르시기 위해 인성을 쓰셨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돼야만 했다. 인간에게 속한 것은 불완전하다. 같은 말로써 뜻이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표현을 할 수 있다. 각기 뚜렷한 사상을 표현함에 있어서 한마디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성경은 감동을 입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기록된 것이며 성경 자체가 하나님 자신의 사고 방식이나 표현 양식이 아닌 것이다. 성경은 사상과 표현에 있어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것이다… 성경의 말씀 자체가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감동을 받은 것은 사람들이었다. 영감은 인간의 언어나 표현 방법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 자신에게 작용하는 것이며 그는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아 그의 사상이 그 감화에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성육신의 원리와 선교
바울은 이 성육신의 원리에 입각해서 자신의 선교 사역을 이끌어 나갔다. 그에게 주어진 이방인을 전도하기 위한 사역은 자신의 문화적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하는 상당한 희생이 요구됐다. 우리의 선교사업에서 그다지 큰 성과가 있지 못하다면 거기에는 문화적 장벽을 뛰어 넘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성육신의 희생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했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유럽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조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9:19~23).
이 말씀이 주고 있는 약속은 우리가 더욱 사람들과 같이 되고자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올 것이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처해 있는 문화에 맞게 복음을 상황화(contextualization)해야만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한다. 시각적인 미디어에 영향을 받는 현대인들을 위해서는 시각적인 것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행동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이 행동으로 전해져야 한다. 여전히 스토리 중심 사회에는 복음이 이야기로서 전해져야 한다. 교훈은 반드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구속적 유비
제임스 엥겔(James Engel)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사람마다 정보를 선별해서 수용한다는 말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세계관과 문화가 형성한 필터링 시스템이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수용자의 세계관이나 문화를 파악하지 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이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이리얀자에 살고 있는 싸위 부족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소개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보다 가룟 유다를 더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계관에 의하면 가장 훌륭한 영웅은 평소에 잘 해 주다가 마지막 순간에 배신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가 딱 그런 사람이었다. 마침내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돈 리차드슨 선교사 부부는 이 부족이 가지고 있던 ‘화해의 아이(peace child)’라는 문화를 사용했다. 이것은 두 부족간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 부족에게 자기 부족의 아이를 보냄으로써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 화해하며 지내도록 하는 습관이다. 선교사가 이 ‘화해의 아이’를 비유로 예수님을 소개했을 때 마침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됐다. 이것을 ‘구속적 유비(the redemptive analogy)’라 한다. 
 각 문화마다 가지고 있는 문화적 특성들을 이해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사람마다 문화적 지평(cultural horizon)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방에서 실내만 보고, 어떤 사람은 창밖의 도시를 보고, 어떤 사람은 골짜기를 보고, 어떤 사람은 평야와 산꼭대기를 본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지식과 정서와 경험이 다르고, 지리, 가족배경, 학력, 성별, 종교에 따라 가지고 있는 이해의 수준이 다르다. 이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성육신의 원리는 우리가 그들의 수준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안식일, 한국 사회를 위한 복음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오늘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복음을 전해져야만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안식일의 기별이 오늘날 한국 사회를 위한 최고의 기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수십 년 만에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부국을 이룬 압축 경제성장의 결과 우리 국민들은 지금 ‘저녁이 있는 삶’을 갈망하고 있다. 피곤한 직장인들은 쉼을 얻기 위해 이곳 저곳을 기웃거린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할 수 있는 일이 가장 사치스런 희망사항이 됐다. 그래서 ‘삼시세끼’같은 프로그램들이 등장하고, ‘도시어부’들의 여유를 부러워한다. 그러면서 깨져버린 공동체성을 갈망하며 ‘한끼줍쇼’ 같은 프로그램들이 안방극장을 채우고 있다. 
산업시대가 만들어낸 인간성 상실의 문제는 더 이상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매스컴은 오늘 저녁도 한국 사회의 권력지향적 엘리트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가진 자들의 갑질에 피곤한 한국사회다. 이런 상황에서 안식일 24시간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노래하며, 좋은 음식 먹고, 가족간의 시간을 보내는 우리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럭셔리한 삶이다. 한편, 안식일은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쉼을 줘야 한다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초청이다. 안식일에 구매행위를 하지 않는 이유가 안식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돈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졌으나 없는 자며, 없지만 가진 자들이다. 안식일이 갖고 있는 해방의 정신은 일곱 번의 안식년이 지난 이후에 맞게 됐던 ‘희년(Jubilee)’이 내포한 사상이다. 안식일은 나를 위한 날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위한 날이다. 서로를 소외(alienation)시키며 자신을 높이기 위해 살았던 삶에서 떠나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마22:39; 갈5:14 참고)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날이 안식일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모든 인류를 하나님의 자비 안으로 초청하는 영원한 복음이다. 복음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복음이 문화 안에서 상황화되기 때문이다. 

* 참고서적 : Jon Paulien, Evelasting Gospel, Ever-changing World: Introducing Jesus to a Skeptical Generation, Pacific Press,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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