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호> 세계관의 변화와 선교
기자 : 재림신문사 날짜 : 2018-03-29 (목) 13:50

하나님 나라와 
          선교(4)

세계관의 변화와 선교



                      - 최경천 / 삼육대학교 신학과 교수


이번 연재에는 재림교회 선교 전략적 측면에서 보다 성경적인 선교방법들을 개발하기 위한 신학적 토대로서 ‘세계관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지난 연재에서 다뤘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자. 회심이 일어난 것을 무엇을 통해 알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19세기적 패러다임은 기독교인다운 행동 즉 금연, 금주하고 춤을 추지 않고, 극장에 가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된 것으로 봤다. 20세기적 패러다임은 기독교가 표방하고 있는 기본교리들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을 수용하면서 수침시 “예”라고 말하면 회심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여기에 폴 히버트(Paul Hiebert)같은 선교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행동도 바뀌고 신앙도 고백했지만 여전히 행동과 인지를 만들어내는 ‘세계관’이 바뀌지 않았을 때, 소위 ‘혼합주의’(syncretism)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교회의 도전이다. 

혼합주의의 도전
혼합주의는 서로 다른 원리 위에 서 있는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혼합하는 것으로 일종의 ‘절충주의’다. 순수 기독교 신앙 안에도 다양한 종교, 문화적 철학이 혼재돼 있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헬라의 이원론이 기독교 신앙에 혼합돼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는 교리적 문제를 낳았다. 불교의 고행이나 수행 같은 사상이나 신비주의 형태의 기독교 이해도 혼합주의의 예라고 볼 수 있다. 또는 인본주의, 합리주의, 자유주의, 종교다원주의 등과 사상이 기독교 복음과 섞이게 될 때 혼합주의가 일어난다. 여기에 문화적 혼합주의도 한 몫을 한다. 크리스마스에 산타클로스가 등장하는 것이나 한국 기독교에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이 혼합된 것이 전형적인 예다. 흥미로운 것은 토속적 문화 가치체계가 기독교 진리의 어떤 부분과 접목될 때 외적인 성장이 일어나는 예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폭발적 성장은 한국인의 심성 속에 있는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을 기독교와 접목시킨 결과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다면 순수한 복음전파와 회심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순수한 복음을 추구하는 재림교회 역시 이 혼합주의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재림교회 학자인 구츠쿠스(Heide Guttschuss)는 “혼합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기독교 교단은 하나도 없다. 모든 교단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혼합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화잇 여사 역시 교회 내에 존재하고 있는 혼합주의적 신앙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의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과 불신자들과의 한계를 거의 구별할 수 없게 돼 있다. 교회의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있고 그들과 연합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사단은 그들을 하나의 단체로 연합시켜 강신술의 대열에 쓸어 넣음으로써 그의 사업을 강화시키고자 결심하고 있다”(대쟁투, 영문 588). 

회심과 세계관의 변화
다시 질문을 요약해보자. “복음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무슨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가?”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대쟁투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편에서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계2:23)고 말씀하고 계시며, 사단 역시 “사단의 깊은 것”(계2:24)으로 이 전쟁에 임하고 있다. 태초부터 인간의 자발성에 기초한 전적인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은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히4:12; 롬8:27 참고)하시며, “중심을 보”(삼17:6)신다. 기독교가 말하는 회심은 ‘마음의 회심’이며 이것을 폴 히버트의 개념을 빌리자면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회심은 각 문화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세계관을 넘어선 초문화적 세계관(supra-cultural worldview)이 인간의 중심 곧 마음에 자리잡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초문화적 세계관을 발견하고 적용하는 일은 평생에 걸친 거대한 사업이다. 끊임없이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적 행태들을 초문화적 원리들에 의해 거울로 비춰보고, 지속적으로 교정하고, 적용해 나가는 일은 개인 신앙의 차원에서는 물론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교회신앙의 차원에서 도전받고 있는 가장 실제적인 과제들이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전인격적, 전존재적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심은 단순히 예언전도회에 참석해 어떤 사실을 인지적으로 배웠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교리공부를 통해 인식적 차원의 새로운 이해가 생겼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가슴이 한 번 뜨거워졌다고 회심이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이전 행동습관의 어떤 부분이 바뀌었다고 해서 회심했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회심은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인으로 왕으로 모시게 될 때 지, 정, 의 모든 면에서 일어나는 전인적이고, 변혁적이며, 지속적인 과정이다. 다시 말해 회심은 끊임없는 세계관의 변화다. 
챨스 크래프트(Charles Kraft)는 이와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한 문화권 속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그 문화 속에 내재돼 있는 세계관에서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이 되는 이 문화 변혁은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초문화적 원리를 추구함과 동시에 문화에 대한 재해석과 그 결과적 변혁을 일으키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므로 가능하다” 여기에서 세계관 변화를 위한 두 가지 요소가 소개되고 있다. 하나는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사역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는 그 속에 모든 문화를 초월하는 초문화적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민족이나 부족이든지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우주적 진리가 성경에 있다. 비록 성경이 유대 문화적 배경속에서 기록된 것이긴 하나 예수님은 유대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이 같은 사실이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에서 드러난다.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창12:3) 복을 받을 것이었다. 그래서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아예 “열국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셨다. 교회는 끊임없이 모든 문화를 초월하는 초문화적 구원의 원리를 발견하고 적용하기 위해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문화권에 종속되는 문화적 복음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성령의 사역이다. 개인과 교회와 사회의 변혁은 단순히 지적 이해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변화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내주를 통해서 가능하다. 성령은 새로운 빛으로 우리에게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새로운 변화를 위한 운동력을 제공하신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로 살아가는 것이 복음의 기본이며,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일어났던 방언의 역사가 설명해 주고 있다. 방언은 단순히 성령 받았음을 드러내는 표식이 아니다.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 인과 아라비안 인들이”(행2:9~11)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행2:8) 복음을 전해 들었다. 성령은 복음이 초문화적인 것이며 동시에 각 문화권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도록 상황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복음은 각 문화의 옷을 입지만 세계적인 기별로 문화를 초월한다.  



문화와 세계관
선교를 통해 일어나는 회심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화와 세계관을 구분해서 알아야 한다. 폴 히버트는 문화를 “어떤 집단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다소 통합된 믿음, 감정, 가치관의 체계 및 그것들과 관련된 상징, 행동 유형, 그리고 그 결과”라고 규정한다. 이 문화에는 세계관이 포함돼 있다. “다소 통합된 믿음, 감정, 가치관의 체계”라는 부분이 세계관이다. 문화를 사람의 신체에 비유하자면, 세계관은 골격이다. 문화를 컴퓨터에 비교하면 세계관은 컴퓨터 운영체제(OS)다. 문화를 빙산으로 비유하면, 세계관은 빙산의 물 속에 잠겨 있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관은 문화의 보다 본질적인 부분이다. 세계관은 문화의 핵(core)이다. 
세계관은 한 문화의 양식을 지지해 주는 구조물 같은 것으로 세 가지 영역에서 역할을 한다. 바로 믿음, 감정, 가치관이다. 이것을 인지적, 감정적, 평가적 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각 문화 속에 내재돼 있는 이 “믿음, 감정, 가치관의 체계”라는 세계관이 문화의 양식과 행동과 유형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 사용해 온 금줄에는 “부정탄다”라는 믿음과 감정과 가치관이 숨겨져 있다. 발리(Bally) 섬 사람들이 각 집 앞에 꽃과 과자를 진설하는 돌로 만든 작은 사당(귀신집)은 귀신들은 향과 단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사당에 놓여진 꽃과 과자를 보고 집안으로 들어와서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는 믿음과 감정과 기치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이 발리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귀신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며, 이미 십자가에서 정복된 대상으로 소개될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하나의 문화로써만 소개되면 귀신을 쫓는 부적으로 십자가를 대치시키는 일종의 혼합주의가 일어날 수 있다. 선악간의 대쟁투라는 영적 싸움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발리 힌두교식 기독교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차원에서 선교는 세계관의 변화를 목표로 해야 한다. 힌두교의 세계관을 기독교 성경적 세계관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선교다. 한국적 세계관(유교적, 불교적, 샤머니즘적 등)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선교의 목적이다. 핵(core)을 바꾸는 것이다. 

한국 재림교회와 샤머니즘
그렇다면 한국재림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동안 사람들의 믿음과 감정과 가치관의 체계라고 불리는 세계관을 제대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또는 재림교회 내에 극복해야 할 혼합주의적 요소는 없는가?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재림교회 안에도 여전히 샤머니즘적 세계관의 요소들이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데이빗 정(David Chung)에 의하면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소개될 때 한국인들과 접촉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느님’이라는 유일신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림교회가 한국사람들을 만나게 됐을 때에 한국인들의 세계관과 충돌하면서 시작했을 것이다. 폴린의 지적처럼 처음 복음이 전해질 때 한국인들은 한동안 한국인의 가치 체계 즉 세계관의 렌즈로 기독교 복음을 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한국 적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거쳐 온 것이다. 그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 샤머니즘이다. 
샤머니즘은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한국인의 심성에 깔려 있던 세계관을 형성해 왔다. 비록 재림교회 기별이 무당을 통해 귀신을 섬기는 일을 제거시켜 왔지만, 샤머니즘 세계관은 쉽게 극복되는 문제가 아니다. 재림교회는 다른 교단과 비교할 때 기복신앙을 경계하는 등 샤머니즘을 상당히 극복한 교단이지만, 그 결과 또 다른 신앙적 문제가 발생되고 있다. 여전히 기독교 세계관과 샤머니즘이 서로 갈등하며 경쟁하는 모습이 한국재림교회 안에서도 발견된다. 지면상 샤머니즘의 특징을 (1)물질주의 (2)감각주의 (3)인간중심주의라고 요약하고 이 세 가지 차원에서 한국재림교회 선교를 평가해 보겠다. 
먼저, 샤머니즘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은 기복신앙 또는 번영신앙으로 혼합된다. 재림교회 이철재 목사의 박사학위 논문(2004)이 밝히는 것처럼 한국재림교인들은 헌금을 하는 이유는 물질적 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동기가 강했다. 하지만 근대 사회의 급속한 경제성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머리를 들고 있는 ‘신 샤머니즘’(neo shamanism)적 물질주의로부터 현재 한국재림교회가 자유로운지는 재평가해봐야 한다. 물질이라는 신은 여전히 재림교인의 삶에서 조용히 작용하고 있는 극복되지 않은 샤머니즘적 세계관일지 모른다. 
두 번째로 감각주의는 재림교회가 전통적으로 경계해 온 비기독교적 세계관이었다. 우리는 진리를 인지적 측면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가지고 교리 공부를 중요시 여겼다. 그리고 감정적 표현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 같은 태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의 일상생활을 분리시키는 문제를 만들었다.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내주하심이 일상생활에서 경험되는 일은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며(고전10:31), 직장에서든지 집에서든지 주는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것이 복음이다. 하지만 재림교회 건강기별이 단순히 과학적, 임상실험적 방법으로 접근하게 되면(예: 어떤 음식은 어디에 좋다),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치유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놓치게 된다. 해야 할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세 번째로 인간중심주의라는 측면의 샤머니즘적 세계관은 재림교회의 교회운영 방식이나 리더십 측면에서 쉽게 발견된다. 교회가 몇 사람의 탁월한 리더들의 결정에 의해서 움직이든지, 재정의 사이즈에 의해 사업이 결정된다면 비즈니스와 차이가 없다. 건실한 경영을 통해 안정된 사업을 펼쳐야 하지만, 교회는 계산기를 두들겨서 나오는 결과로 움직이는 단체가 아니지 않는가? 교회의 협의와 회의가 인간중심이 아니라는 것은 투명한 정책과 회의를 통한 합의가 이뤄질 때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고, 화목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두 세 사람이 연합해 기도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처럼 선교사업이 마음을 합친 구성원들의 헌신에 의해서 이뤄질 때, 교회를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회심은 세계관의 변화가 돼야 하며, 선교는 세계관의 변화를 목표로 행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단순히 선교정책과 전략을 제시하기 전에 그 전략들이 감인식과 감정과 가치관의 변화를 변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복음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의 감정을 고양시키며,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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