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호> 복음의 본질과 선교
기자 : 재림신문사 날짜 : 2018-03-23 (금) 10:15

하나님 나라와 
          선교(3)

재림교회와 천국



                      - 최경천 / 삼육대학교 신학과 교수


예수님과 성령의 임재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봉사는 성령으로 시작해 성령으로 마쳐진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마1:18, 20).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셨다(마3:16). 그의 사명이 요한의 물의 침례와 달리 “성령과 불”(마3:11)로 침례를 베푸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눅4:1)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초막절에 외치셨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셔 마시라”(요7:37)는 기별로 시작된 그의 복음은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요7:39)의 기별이었다.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은 십자가의 복음이 향하고 있는 최종목적이었다. 그래서 부활하신 이후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명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13:13, 14)

복음의 첫 번째 목적: 열방의 구원
복음은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것으로 완성된다. 그 순간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눅17:21). 갈라디아서는 십자가의 복음을 적어도 두 가지 차원의 목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복음이 다다르는 거리를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유대인의 조상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의도는 처음부터 달랐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고 약속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창17:4, 5)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아예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셨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믿음으로 얻은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것을 계시하셨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인종과 방언과 나라가 무엇이든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세워진다는 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로마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4:18)고 선포한다. 갈라디아서에서도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일 줄 알지어다”(갈3:7)라고 반복한다. 그래서 세천사의기별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계14:6‚ 개정)이다. 복음은 그 자체가 선교적이다. 복음은 처음부터 열방을 품고 있고, 이방인을 향해 나간다.  
복음은 사람들을 단순히 안식일교인으로 만드는 차원의 기별이 아니다. 복음은 모든 “땅에 거하는 자들”(계14:6)을 향해 나간다. 이 세상은 전적으로 피하거나, 도망가거나, 기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세상 또는 세대 또는 육신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세계에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저주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 바울은 예수님은 성문 밖에서 죽임을 당하셨음을 지적하며, 성도들에게 “그 능력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전13:13)고 초청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바울은 음행을 피하라고 했지만(고전6:18; 7:2),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5:10)고 권면한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들으셨던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11:19; 눅7:34)는 말이 가진 복음의 우주적 확장성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에…괴수”(딤전1:15)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찾아 오셨고, 복음은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행2:39) 것으로서 바울을 구원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는 진술에는 이미 구원을 받은 신자들도 포함된다. 구원은 우리 인간의 어떤 도덕적 개선이나 윤리적 재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롬5:8)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보다 “세리들과 창녀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마21:31)는 것이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초청한다. 복음은 죄인을 불러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만든다. 복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며 아예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계1:5)가 되도록 만든다. 하나님과의 밀착된 관계가 복음의 두 번째 목적으로 갈라디아서에서 제시하고 있다. 



복음의 두 번째 목적: 성령 충만과 동행
복음이 가진 두 번째 목적은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처럼(롬4:13)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갈3:14)는 것이다. 바울은 선언적으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고 외친다. 누군가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단순히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지,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지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성령이 심령 속에 거하시는지로 분별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면 어떤 교리적 신념도 아름다운 지식에 그친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알게 되면 재림교회의 핵심교리인 안식일의 기별과 성소의 기별과 재림의 기별이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와 얼마나 가까운 곳에 거하시길 원하시며, 얼마나 친밀한 가족관계 속에서 살고 싶어 하시는지를 알려주는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된다. 
안식일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부자관계임을 알려 주는 것처럼(겔20:12, 20),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롬8:15, 갈4:6)라고 부르게 된다. 안식일이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분의 자녀임을 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신다. 그래서 성령은 “아들의 영”(갈4:6)이며 “양자의 영”(롬8:15)이다. 참된 안식의 기쁨은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 우리 안에 주신 신령한 축복들을 헤아릴 때 충만해진다. 토요일 24시간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 날짜를 거룩하게 지킨다한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롬 8:9)닐 뿐더러 안식일은 성령의 열매인 기쁨과 감사가 없는 종교의무적 행위로만 남게 된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소의 기별은 그 강조점이 분명하다. 모세에게 성소를 짓게 하실 때에 하나님은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출25:8)라고 말씀하셨다. 성소제도를 주신 목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살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사실을 모르면 모든 성소에 관련된 내용들은 생명 없는 수학공식처럼 변해 버린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한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호2:19). 하나님은 우리와 결혼생활을 하고 싶어 하신다. 한 집에서 먹고, 마시고, 이야기 나누고, 사랑을 나누길 원하신다. 사랑이라는 것이 본시 함께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죽어가는 아들을 위해 내 장기를 나눠줘서라도 죽음으로 떠나보내는 대신 함께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장 잘 안 사람 중에 하나였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한 집에 살고 싶어 하는 것으로 설명한 예수님의 말씀을 또렷하게 전하고 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23). 요한은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거처’를 마련하고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성경이 마무리되는 요한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의 장막”(계21:3)이 등장하는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21:3). 요한에게 구원은 신랑 신부가 함께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고, 온 가족이 한 식탁 위에 모이는 것이다. 이 집에는 “생명수 샘물”(계21:6)을 값없이 사서 마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들이 모이며, 그 집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7)라는 선언을 보증으로 받는다. 
이것이 재림의 기별이 가진 내용이다. 재림은 단순히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계14:7)에 고착되는 시간적 차원의 기별이 아니다. 재림은 “처소를 예비”(요14:3)하러 가진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다시 오시는 가족회합의 사건이다. 재림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그분과 함께 살았던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재림은 그 날이 오면 비로소 그분과 함께 산다는 약속이 아니라 지금부터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마침내 하나님과 영원히 연합되는 약속이다. 그래서 재림의 시간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시간 아닌 본질적인 것으로 대답하셨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눅17:20)라고 물었을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고 대답하셨다. 재림은 마음 속에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임한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사건이다. 인생의 ‘키’를 그리스도께 내어 드린 사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완전히 통치하실 재림을 참으로 기다린다. 바울은 참된 믿음의 시금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제시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그래서 바울 신학에서 그리고 요한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롬6:11, 23; 8:1, 2, 10; 8:39; 9:1; 12:5; 15:17; 16:3, 7, 9, 10; 요일4:15; 5:20 참고) 신학이다.  
 제자들이 예수님 승천 직전에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라고 다시 시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가시적인 나라의 회복을 보고자 했는데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시려고 하는 순간이 오자 마음이 급해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1:7)라고 단언하셨다. 그러고 나서 동문서답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행 1:8). 그렇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것은 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거하시는 성령의 문제임을 분명히 밝히신 것이다. 마음에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 묻는 일은 불필요한 것이다. 그 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나라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떤 사실을 전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어떤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면 그것을 회심으로 불렀던 19세기 외적 행동 차원의 전도나, 어떤 교리를 받아들이고 고백하면 회심이 일어난 것이라고 믿었던 20세기의 지적인 차원의 전도를 넘어선다. 복음은 전인격적인 변화이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변화다. 이것을 선교학에서는 세계관의 변화라고 부른다. 신앙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문제임을 우리는 잘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는 말씀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특별히 성령의 역사를 통해 아예 우리의 심령이 새로운 마음으로 교체되는 것이 참된 회심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6).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삼상16:7). 하나님은 인간의 숨은 뜻과 마음을 살피신다(계2:23), 사단 역시 단순히 신자들의 수를 줄인다거나 교회의 재정을 약화시키는 외적인 활동을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도 역시 “사단의 깊은 것”(계3:24)으로 승부수를 던진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은 마음의 문제이며, 동기의 문제이며,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남의 문제이며,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삶의 문제다. 
재림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 역시 안식일의 시간적인 기별이나, 재림의 징조적인 사건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재림교인들에게 안식일은 내 삶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전인적인 차원의 기별이며, 성소의 기별은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동행의 기별이며, 재림의 기별은 마침내 하나님께 영원히 살아가는 하나님나라 가족의 완전한 회합을 추구하는 기별이다. 그래서 복음은 오늘 우리가 희열과 기쁨에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해 주는 “오늘의 기별”이다. 예수님의 복음이 “오늘의 복음”이었으며, “오늘의 기별”이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나라이 임하옵시며”(마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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