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0호>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기자 : 재림신문사 날짜 : 2018-11-01 (목) 16:37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예수님의 음성

                                                     - 손윤호 sony1844@naver.com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시고, 수많은 말씀들을 하셨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어떤 톤(tone), 즉, 어떤 어조로 말씀하셨는지, 그분의 표현력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설교들과 말씀들을 기록하면서 단순히 “예수께서 이르시되”(마8:3; 8:10), “대답하여 가라시대”(마11:4) 라고 기록했다.
이로 보건대, 예수님이 웅변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분명하다. 그분은 일반적으로 평범한 대화체 형식으로 말씀하셨다. 물론 예수님이 큰 음성으로 말씀하신 경우도 있다.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불러내실 때 예수님은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부르셨다(요11:43). 또한 명절 끝날 곧 큰 날에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셨다(요7:37). 이런 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대화체로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돼 있다. 
예수님이 웅변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놀라운 설득력을 갖고 계셨을까? 무엇이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로 하여금 “예수의 음성 속에는 내 심금을 울리는 그 무엇이 있다”고 고백하게 했을까? 어떻게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이 딱딱하게 굳은 유대 관원 니고데모의 마음의 딱딱한 표피를 뚫고 들어갈 수 있었을까? 어떻게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 영적 생수를 갈망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까? 

예수님 음성의 설득력
어떻게 예수님의 음성이 그렇게 설득력이 있었을까? 우리는 그 몇 가지 비결을 엘렌 화잇의 글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12세 때 율법 박사들과 성경을 토론하고 계셨을 때 예수님의 음성에 대해서 화잇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음성에는 어떤 다른 사람들의 음성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진지함”과 “열성”이 실려 있었으며, “아름다운 음조가 충만했다”(소망,81). 엘렌 화잇은 또 다른 경우에 이렇게 말한다. “그분의 용모의 아름다움, 그분의 품성의 자애로움, 무엇보다도 표정과 어조(tone) 속에  표현된 사랑이 불신으로 마음이 무뎌지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그분께로 이끌었다. 모든 외모와 말씀 가운데 비친 친절하고 동정 깊은 정신이 아니었다면 예수께서 큰 회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셨을 것이다”(소망,255). 그분의 음성에는 사랑이 실려 있었으며,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그 어조 속에서 그분의 친절과 동정 깊은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은 친절과 동정을 싣지 않고서는 그분의 입에서 말을 내어보내지 않으셨다. 그러한 현저한 예를 우리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께서 두로 지방에 계실 때,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인 한 여자가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주시기를 간구했다. 그때 예수께서는 평소답지 않게 매몰차게 말씀하셨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이방인인 그녀에게 그분은 도움을 베풀기를 거절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가나안 여자가 자존심 상하지 않고 또 낙심하지 않고,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하면서 구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가?(막7:24~30) 
화잇 여사는 그 여자가 낙담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의 표면상의 거절 그 이면에 숨길 수 없는 긍휼하심이 있음을 그 여인은 봤다”(소망,401). 말하자면 예수님은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실 때 절대로 매몰찬 연기를 하실 수 없으셨다. 그분의 음성 속에서, 어조 가운데서 그녀는 숨기래야 숨길 수 없는 긍휼이 섞여 있음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처럼 예수님은 절대로 사랑과 긍휼과 진실과 열성과 동정을 섞지 않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분이셨기에 그분의 음성은 설득력이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그분께로 모여들게 했던 비결이었다.

용모보다 음성에 더 이끌려
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어린이는 용모보다 음성에 더 이끌린다고 한다. 여기 한 아이가 있고, 두 낯선 사람이 있다. 어린이는 낯선 사람에 대해서 경계심을 갖는다. 한 사람은 용모가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다른 사람은 용모는 별로이지만 목소리가 사랑스럽고 부드럽다. 어린이가 누구에 대해서 덜 경계심을 가질까? 그 답은 다정하고 이해하는, 사랑스러운, 부드러운 음성의 낮선 자를 보고 아이들이 두려워 소리 지르는 일은 드물다는 것이다. 용모보다 음성에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시72:6)렸으며, 아파하는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의 유향을 발라줬다. 
화잇 여사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분의 목소리의 톤 혹은 어조가 큰 기여를 했음을 강조했다(소망,255). 그래서인지 그녀의 여러 책들은 우리가 목소리의 톤을 통제할 필요성을 강력하게 역설한다. “성난 말이 나오려 할 때는 두 배나 자제하라.” “어린이는 어린 시절 많은 눈물을 흘린다. 거친 말들을 하면 감수성이 예민한 마음에 불행과 불화의 흔적을 남긴다.” “결코 그대의 목소리를 거칠게 높이지 말라. 그대의 목소리의 톤을 낮추라”(자녀, 434~443 참조).
우리가 나쁜 마음을 품고 다른 사람을 비평하고 험담을 할 때, 우리 성대는 긴장을 한다. 우리의 목소리는 작아진다. 언쟁을 하면 목소리의 가락이 높아진다. 공기를 찢는 금속성 소리를 우리는 종종 듣는다. 그러나 격려와 위로의 말을 할 때에는 우리의 음성의 질이 넓고 깊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서 격려의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의 음성이 어떠했는지, 그 어조가 어떠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은 책망도 하시고 견책도 하셨다. 그분은 그럴 때에 어떤 톤으로 말씀하셨을까? ‘정로의 계단’에 그 해답이 나온다. “그는 진리를 말씀하시되 항상 사랑으로 하셨다. 그는 외식과 불신과 불의를 단연히 견책하셨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심한 견책을 하실 때 그의 음성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정로,13).
은혜를 머금은 입술을 열어(시45:2), “말로 곤핍한 자를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는” “학자의 혀”(사50:4)로 발하신 예수님의 비할 바 없는 매력적인 음성이여! 그 음성에는 사랑과 동정이 실리고, 열정과 진실이 표현되고, 그리고 눈물이 섞여진 음성, 그렇기에 멀리까지 나아갈 뿐 아니라 마음을 뚫고 들어가 심금을 울렸다. 

말을 내적 생애의 표현이 돼야 해
웅변학교에 가면 어떤 구절을 외우고 톤의 강약을 조절하고, 점강법, 제스쳐 등등의 기교를 배운다. 그러나 백수십 년 전 보스턴대학의 에드문드 니일 교수는 아주 다른 각도에서 웅변을 가르쳤다. 그는 어떤 구절을 외우도록 연습시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웅변 원리는, 연사의 음성과 말이 자신의 마음속의 생각과 개념을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자신이 체험하고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을 말하도록 한 것이다. “산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충분히 깨달아지면, 음성은 산을 묘사할 만큼 충분한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갖게 될 것이다”가 그 교수의 지론이었다.
음성이 무엇이며 말이 무엇인가? 우리의 뇌가 생각하는 것을 우리의 목소리를 통해서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음성은 그것 이상이다. 니일 교수는 “음성은 개인의 생애를 지배하는 생각과 사상을 표현하는 완전한 도구다. 자신의 생애를 통제하고 인도하고 지도하고 그에게 열정을 주는 그런 생각과 사상을 표현하는 도구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웅변을 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압도당하고, 큰 감화를 받고,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고, 너무도 절실하게 느끼고 사랑하는 그 사상을 말로 표현한다면, 그런 것들이 음성에 실린다면, 바로 그것이 웅변이다. 
말은 단순히 공허한 원칙을 말하고 당위성을 강조하고, 사실만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나의 말이 내적 생애에서 실천되는 것을 드러내도록 할 때, 마음속의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 되도록 할 때(시15:2), 참으로 우리는 웅변을 하게 될 것이다. 에밀 브루너는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다. “불타는 가슴은 불타는 혀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말이 마땅히 우리의 내적 생애의 표현이 돼야 할 것에 대해 위대한 본을 보여주셨다. 그분의 말이 설득력이 있었던 이유는 그분의 말이 그분의 생애를 지배하는 원칙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요7:46)란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그 때에서야 우리 재림교인들은 비로소 “큰 외침”으로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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